이참에 알아본 전세계 치과치료 비용추이에 관한 나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거란(기탄, 요나라)의 명칭, 역사, 고려·중국과의 관계에 대한 종합 해석론
— 동아시아 정복왕조로서의 거란사 재조명 —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동아시아에서 대제국을 형성한 거란(기탄, 요나라)에 대한 종합적 고찰을 목적으로 명칭의 기원, 역사 전개, 고려 및 중국과의 관계, 그리고 정복왕조로서의 정치·문화적 특성을 다각도로 알아보겠습니다. 내용에 더하여 비트포겔의 정복왕조 이론을 바탕으로, 거란이 의미없는 이민족 왕조가 아니라, 한화(漢化)를 거부하며 독자적 정체성과 통치 방식을 유지한 동아시아 정복왕조임을 강조하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발해 멸망, 연운 16주 획득, 송나라와의 전연의 맹약, 고려와의 3차 전쟁 등은 거란사의 주요 분기점으로 재조명되며, 현대적 시사점을 제공고저 합니다.
1. 서론
거란, 또는 기탄으로 불리는 이 유목민족은 10세기 동아시아 질서 재편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 의해 건국된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키고, 송나라 및 고려와 군사적, 외교적 경쟁을 벌이며 ‘정복왕조’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정체성과 정치문화, 그리고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국내외 학계에서 여전히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내용인 즉 은 이러한 거란사의 다양한 측면을 통합적으로 분석하고, 현대 동아시아사 속에서 거란의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해 보았습니다.
2. 명칭의 유래와 용어 분석
‘거란(契丹)’이라는 명칭은 당대 중국 문헌에서 등장하며, 실제 발음은 ‘기탄(Khitai)’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야율씨 정권은 스스로를 ‘기탄’이라 칭하였으며, ‘요(遼)’는 한자 문화권을 대상으로 한 외교적 명칭이었습니다. 이 용어는 러시아어 ‘Китай(Kitay)’와 유럽 중세 문헌의 ‘Cathay’로 전파되며, 중국의 또 다른 명칭으로 오용되기도 했었습니다.
3. 거란족의 기원과 요나라 건국
기탄족은 요하 유역의 유목 민족으로, 당 말기 혼란을 계기로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졌습니다. 916년 야율아보기는 기탄국(거란)을 건국하고, 기존 부족연합 체제를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제로 전환하였습니다. 이는 유목민족에서 농경지 통치로의 대전환이자,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4. 발해 멸망과 동단국
926년,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동단국을 설치하였습니다. 발해 유민은 거란의 문화적 포용 속에 통합되었으며, 이는 거란의 다민족 제국으로의 확장 기반이 되었습니다. 발해 멸망 원인에는 백두산 화산 폭발설, 내부 분열설, 외부 침공 등이 있으나 기록 부족으로 명확하지 않습니다.
5. 연운 16주와 정복왕조로의 전환
936년, 후진의 요청에 응한 거란은 연운 16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하며 본격적인 한족 지역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야율 정권은 본거지 요동과 만주를 기반으로 삼고, 정체성의 유목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비트포겔이 정의한 ‘정복왕조’의 핵심적 특징임을 반증합니다.
6. 송나라와의 외교: 전연의 맹약
송은 한족 정통성 회복을 위한 북벌을 시도하였으나, 1004년 전연의 맹약으로 인해 좌절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송이 연운 16주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해마다 은·비단을 조공하는 조건으로 체결되었으며, 거란이 대등하거나 우위에 있는 외교적 승리로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7. 고려와의 관계: 세 차례 전쟁과 외교 전략
거란은 고려와 다음과 같은 전쟁을 벌였다:
1차 침공(993년): 송-고려 연계 차단 목적. 고려는 송과의 단절을 약속하고 외교적으로 종결.
2차 침공(1010년): 강조의 정변을 명분으로 대규모 침공. 개경 함락 이후 협상 타결.
3차 침공(1018년):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거란 대군 격퇴. 이후 양국은 실질적 평화 유지.
이러한 갈등은 유목 세력과 농경 왕조 간 전략적 줄다리기의 전형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
8. 정치·문화적 특성
기탄은 독자적 문자(거란대자·소자), 언어, 헤어스타일(곤발톱), 호위 군대 등 고유의 유목 전통을 유지했습니다. 황후 소씨와 황제 야율씨의 권력 이원화는 독특한 통치체제의 상징이었으며, 이러한 이중 구조는 금나라와 청나라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9. 역사적 평가와 현대적 시사점
거란은 단순한 ‘이민족 정권’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다민족 제국을 처음 실현한 존재로 평가받습니다. 명칭에서부터 제도, 문화, 외교전략까지 독립적 정체성을 고수했으며, 이는 후대의 금·원·청 정복왕조 모델로 작용하였습니다. 특히, 오늘날 ‘China’라는 명칭이 기탄에서 유래했음을 보면, 거란은 세계사적 영향력도 갖고 있습니다.
결론
이러한 내용에는 망한 나라의 역사적 존재 이유 가 무엇이며 우리 대한민국은 왜 거란을 우리역사의 일부로 기록하는가 하는 중요한 내용을 알리기 위함이며 ]거란(기탄, 요나라)이 동아시아 역사에서 이민족 왕조가 아닌, 자립성과 유목적 특성을 끝까지 유지한 정복왕조였음을 밝히고자니했습니다. 이들의 역사적 전개와 국제관계, 문화적 자율성은 현대의 민족 정체성과 역사 해석에 깊은 통찰을 제공하고싶습니다.
참고문헌 (References)
Wittfogel, K. A. (1949). History of Chinese Society: Liao.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Crossley, P. K. (1999). A Translucent Mirror.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Franke, H., & Twitchett, D. (1994).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6. Cambridge University Press.
Lee, Ki-Baik. (1984). A New History of Korea. Harvard University Press.
박한제 외, 『동아시아사 입문』, 서울대학교출판부, 2016.
송기호, 『고려와 요나라 관계사 연구』, 지식산업사, 2008.
김용만, 『고려와 거란의 전쟁』, 책과함께, 2011.
용어 정리 및 연표
용어 설명
기탄(契丹) 거란의 자칭 명칭, 유럽에선 Cathay로 전파
요(遼) 야율아보기가 사용한 한자식 국호
연운 16주 936년 획득한 장성 이남의 전략적 영토
전연의 맹약 1004년 송-요 간 체결된 불평등 조약
정복왕조 본거지를 지키며 한화를 거부한 유목 왕조 체제
Footnotes
Franke, H. (1994).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6. Cambridge University Press. ↩
Wittfogel, K. A., & Feng, C. (1949). History of Chinese Society: Liao.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
Lee, Ki-Baik. (1984). A New History of Korea. Harvard University Press. ↩
Wittfogel, K. A. (1949). Oriental Despotism. Yale University Press. ↩
Crossley, P. K. (1999). A Translucent Mirror: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